마취 없이 수술했던 중세 시대 수술과 의학 기술의 발전

2023. 6. 29. 09:12각종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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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없이 수술했던 중세 시대 수술과

의학 기술의 발전

<출처>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YouTube

오늘은 중세 시대 의학과

수술의 발전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이전의 의학은 전부 거짓이라는 말이 있죠.

19세기부터 인류의 의학 기술을

정말 큰 폭으로 발전했습니다.

바로 '마취'가 등장하면서부터 말이죠.

사실 마취가 등장하기 전까지 의학과 수술은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수술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심지어 수술 방법들도 하나같이 기괴했습니다.

그래도 르네상스 시기부터는 의학의 근대화가

한창 이루어졌지만

그보다 전인 중세 시대는

수술 방법이 정말 끔찍했습니다.

17세기 이전 인류는 과학에 대해서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대부분을 종교에 의지하는 느낌이 강했죠.

종교적인 방향과 어긋나는 수술법이나

의학은 천대를 받기 쉬웠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민간요법이 대세인 것이죠.

종교와 어긋나는 방법들은 대부분

'단순 절단' 행위였습니다.

수술 도구만 봐도 이게 무기인지

의학 도구인지 알 수가 없죠.

중세 의학의 기괴함의 극치를 찍었던 것은

'흑사병'이 창궐한 시기였습니다.

사실 흑사병과 흑사병 의사가 오늘의

주요 주제가 될 것 같네요.

중세의 의학 수준은 이제야 문제를 인식하는

그런 단계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엉성하지만 어쨌든 종교가

관장하던 의학이 별개의 영역으로

떨어져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과연 중세 의학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어떤 과정들을 거치면서 현대 의학의

모습까지 도달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의학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가.

바로 '이탈리아'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중흥과 의학은 이탈리아를

빼놓고 말하기 힘듭니다.

최초의 의과대학을 설립한 것도

르네상스 시대를 개척한 것도

'이탈리아'였으니 말이죠.

800년대 말 이탈리아 살레르토에서

최초의 의과대학이 생긴 이후

400년 넘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의학 분야'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탈리아가 최초라고 해서 의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죠.

9세기 말의 의학은 여전히

종교적인 의미가 더 컸으니까요.

병원 건물들은 대부분 종교 집단의 산물이었고

지역에 병원 건물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 종교 집단의 힘이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12세기까지만 해도 치료는

신앙심을 기르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고

그 이후의 문제가 위생이었죠.

실질적으로 신학과 의학이 분리된 것은

13세기 프랑스 몽펠리에

의과대학이 설립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과' '내과'로 나누어진 것이죠.

몽펠리에 의과대학은 인류의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사실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해봤자

이론적으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죠.

이 시기의 의학에서 집중할 것은

바로 '수술'의 등장입니다.

신체 부위를 절단하는 수술이 등장한 것이죠.

물론 방법은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환자를 묶어 신체 부위를 절단한 후

인두로 지지는 것이 수술이었죠.

이 시기엔 어떻게 하면 사람의 신체를

효과적으로 절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부학' 연구가 대부분이었죠.

무섭게 생긴 수술도구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전을 이루긴 했지만

아직은 원초적인 방식들이 전부였고

효과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죠.

무엇보다 절단을 위주로 한 '의학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했습니다.

야만적이고 종교적인 교리

역시도 어기는 행동으로 여겨졌죠.

사람들도 수술 중 많이 죽어나갔고요.

외과 의사의 입지는 점점 낮아졌습니다.

여전히 종교적인 치료법이 대세였죠.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 의학의 모습은

14세기 후반부터 등장했습니다.

바로 흑사병의 창궐과 함께 말이죠.

흑사병은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실상 르네상스가 열린 가장 큰 이유가

흑사병의 창궐이니 말이죠.

오늘 흑사병에서 집중할 부분은 '역병 의사'입니다.

중세 의학 하면 많이 떠올리는 이미지입니다.

너무도 익숙하지만 약간의 모순은

익히 알려진 역병 의사 복장은 17세기에 만들어졌죠.

다시 말해서 돌아가 흑사병 창궐 당시에

역병 의사들은 까마귀 가면이나

검은 코트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14세기 의사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알 방법이 없었죠.

일부에서는 대기의 오염이 병을 일으켰다는

나름 현실적인 이유를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사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중세 말기 사람들의 신앙심이 점점 옅어지면서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봤던 것이죠.

의사들은 흑사병을 고치려면

신앙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굳게 믿은 환자들은 그의 가족들과

종교 집회에 다시 참여했고

이런 행동들은 약 효과를 낳았습니다.

뭐 그래도 여기까지는 양반입니다.

몇몇 의사들은 흑사병 창궐을 새로운 기회로 여겼죠.

부유한 환자 몇 명만 뜯어 먹는다면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가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의사의 지시를 무시할 사람은 없었죠.

물론 대부분의 의사들은

잘못된 방법이든 옳은 방법이든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며 헌신했습니다.

아무튼 인류는 흑사병을 끝내 이겨냈습니다.

피해는 막심했지만 인류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으니

생물학적으로는 이겼다고 볼 수 있죠.

흑사병을 이겨낸 인류는

종교가 전염병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고

중세의 야만성 역시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고대의 예술성으로

중세를 지워내기 위한 부흥 운동이 시작되죠.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종교가 존재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역할을 수행했죠.

중요한 것은 종교와 의학이 정말

확실하게 분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의학은 더욱

현실적인 방향으로 커져갔습니다.

펴 순환을 돕는 치료법이나

상한 피를 뽑는 도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이전의 기술들보다는 전문적이었죠.

우리에게 익숙한 역병 의사 복장이 등장한 것도

이 르네상스 시기였습니다.

환자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한 '복장'이었죠.

또 역병 의사들은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이것 역시도 비슷한 이유로 사용되었습니다.

역병 의사의 복장 외에도 이 시기에

등장한 의학 도구들은 많았습니다.

(총탄을 빼낼 의학 도구 등)

그리고 위생적인 부분들도 크게 개선되기 시작.

의학 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술은 야만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르네상스 시기의 변화 과정은

절대 무의미하진 않았습니다.

르네상스에 개발된 기술들이 발전하여

근대 의학이 된 것이니 말이죠.

근대와 중세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

바로 '마취'입니다.

사람의 신체를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턱대고 자른 다음에

인두로 지졌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쇼크'입니다.

극단적인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니 말이죠.

출혈의 문제를 떠나서 '쇼크사'가

수술의 가장 위험한 요소였으니깐요.

15세기가 예술의 시대였다면

18세기는 과학의 시대였습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종교의 교리를 깨고

이런저런 실험들을 시작했죠.

수많은 지식인들이 실험에 나서며

인체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이어왔습니다.

백신의 개념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격리'의 개념도 생겼고

마취를 통한 환자의 안정에 대한

연구도 이뤄졌죠.

유전학에 대한 연구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피임기구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눈을 뜨지 뭐 했던 세계가 펼쳐진 것이었죠.

이후 19세기 나이팅게일의 등장과

효과적인 마취법의 등장은

여태까지 어둡기만 하던 의학과

수술 분야에 빛을 내렸습니다.

19세기 이전의 의학은 '모두 거짓'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큰 '차이'가 생긴 것이죠.

인류의 사망률은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근대와 현대의 의학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근대 의학이었죠.

<출처>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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